“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 이것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천사들의 환호입니다.(루가 2, 14 참조) 우리는 장엄하게 대희년의 막을 여는 성탄절 전야에 이 기쁜 환호 소리를 다시 한번 듣게 될 것입니다.
새 천년기가 밝아오는 이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전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이 마음속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인간 관계를 새롭게 하며, 폭력과 전쟁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형제애를 갈망하게 할 것입니다. 대희년은 이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2. 이토록 뜻 깊은 새해를 바라보며,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원을 빕니다. 평화는 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평화는 하느님께 간청하여야 할 은혜이지만, 우리는 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날마다 평화를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초월자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인간의 진보와 자연 세계의 존중에 동참하는 문화 속에서 개인과 민족들의 조화로운 관계 모색을 통하여 인정되고 이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고, 희년의 메시지며, 새 천년기를 시작하는 저의 바람입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
3. 우리 뒤에 남기고 온 지난 세기에, 인류는 끝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분쟁,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가정과 국가를 파괴시켰으며, 수많은 난민을 양산하고,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경고는,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입니다.
오로지 평화 안에서 평화를 통해서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넘겨 줄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4. 20세기의 전쟁에 맞서, 평화를 대변하고 평화를 위하여 일했던 사람들이 인류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인간 권리의 천명과 장엄한 인권 선언에 이바지하였던 사람들, 온갖 형태의 전체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주의를 종식시키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위대한 국제 기구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던 수많은 사람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보여준 고결함과 성실함은 우리에게 값지고 빛나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받아
5.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복음서의 이 환호는 진정 이러한 물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곧 새로운 세기는 평화의 세기, 개인과 민족들의 형제애를 새롭게 의식하는 세기가 될 것인가? 우리는 물론 미래를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확실한 원칙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전인류가 근본적으로 한가족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될 때에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6. 이를 위하여 완전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곧 어느 한 정치, 민족, 문화공동체만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선익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느 특정 정치공동체의 공동선 추구가 인류의 공동선, 곧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한 인간 권리의 인정과 존중으로 드러나는 공동선과 상충되어서는 안됩니다.
인류에 대한 범죄
7. 이러한 원칙은 중요한 결론을 낳습니다. 곧 인권에 대한 침해는 인류의 양심에 대한 침해며, 나아가 인류 자체에 대한 침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인권 수호의 의무는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지리적, 정치적 경계를 초월합니다. 인권은 보편적인 불가분의 것이기에 국경이 없다는 신념이 각 민족과 국가의 양심 속에 증대되고 있음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8. 우리 시대에 와서 국가간의 전쟁 횟수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위안이 되긴 하지만,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을 생각할 때 그 양상은 다릅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내전은 실제적으로 모든 대륙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매우 폭력적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극히 복합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내전의 결과로 극도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바로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 등 민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도주의적 원조에 대한 권리
9. 이러한 비극적이고 복잡한 상황 앞에서 그럴 듯한 모든 전쟁의 ‘이유’에 맞서, 인도주의적 법률의 탁월한 가치와 고통받는 민간인과 난민을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의 권리를 보장하는 당연한 의무를 천명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이행할 때 분쟁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편의 이해 관계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10. 여기에서 저의 신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에서 당사자간의 협상은 물론이고 국제단체와 지역단체를 통하여 중재와 화해를 충분히 시도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재와 조정 기관들의 긍정적인 역할에 관한 이러한 믿음은 인도주의적인 비정부기구들과 종교단체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인도주의적인 개입
11. 물론 민간인이 불법 침략자의 공격으로 정복당할 위험이 있고 정치적인 노력이나 비폭력적인 방어가 아무 소용이 없을 때에는, 침략자를 무찌르기 위하여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것은 또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연합은 결정 과정에서 모든 회원국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그 역할과 신뢰성을 약화시키는 특권과 차별을 없애야 합니다.
12. 이것은 우리 모두 진지하고 슬기롭게 개척해 나가고 싶어하는 분야, 곧 정치와 법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토론의 장을 열어 줍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국제법의 개정과 국제단체의 쇄신입니다. 이러한 쇄신의 출발점과 기본적인 조직 원리는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인류와 인간 개인의 선익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평화와 연대
13. 평화에 대한 숭고하고 막중한 임무는 한가족이 되고 또 한가족임을 인식해야 할 인류의 소명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지구 자원의 보편적 용도에 대한 원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재산의 개념과 관리를 확대하여 사유재산의 필요 불가결한 사회적 기능을 받아들임으로써 공동선과 특히 사회의 가장 힘없는 구성원들의 선익에 도움을 줍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기본 원칙이 대부분 무시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남쪽과 북쪽의 격차가 계속해서 증대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지속적인 평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공평과 진리와 정의와 연대 없이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14.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적 양심을 몹시 괴롭히는 한가지 문제는 무수한 사람들의 빈곤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든, 번영하는 부유한 국가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더욱 의로우며 동시에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물질 재화의 용익권과 자신의 노동 능력을 유용한 결실을 위하여 제공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향상은 모든 사람의 윤리적이고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발전을 위한 큰 기회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골칫거리로 보지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새롭고 더욱 인간적인 미래를 건설하는 주역이 될 수 있는 사람들로 봅시다.
경제에 대한 사고 전환의 요구
15. 우리는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 증대되고 있는 관심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빈곤, 평화, 생태계, 젊은 세대의 미래를 포함한 새로운 문제들을 고찰하며 그들은 시장의 역할, 통화와 금리의 광범위한 영향, 증대하는 경제와 사회의 격차, 경제활동과 관련된 다른 유사한 문제들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16. 여기에서 저는 경제학자들과 금융 전문가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제활동과 관련 정책의 목적이 개개인과 전인류의 선익이라는 것을 보장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권유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경제학이나 경제활동과 무관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를 더욱 ‘인간적인’ 학문과 활동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어떠한 개발 모델인가?
17. 한가족을 이루도록 부름받은 인류가 아직도 빈곤으로 양분되어 있는 이 비극적인 사실 자체가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무려 14억이 넘는 인구가 극빈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개발정책 모델의 재고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정당한 요구는, 20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이념적 오류에 빠지지 않는 가운데, 정치 참여와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와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협력은 연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18. 오늘날에는 갈수록 세계적인 차원을 띠는 온갖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편적인 도덕 가치들에 대한 의식의 강화가 과거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증진, 내전과 무력 분쟁의 해결, 소수 민족과 이민자의 보호, 정치적 경제적 부패 척결 등 이 모든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국가도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으며, 전 인류 공동체가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대처하고 해결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미래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알기 쉬운 공통 언어로 토론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의 토대는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보편적 도덕률입니다. 이러한 정신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인간 공동체는 공존의 문제를 직시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존중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선물이신 예수님
19. 그리스도인들은 베들레헴 하늘에 울려 퍼졌던 천사들의 환호 소리를 다시 들으며(루가 2, 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평화”(에페 2, 14)이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의 선물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 인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진 것을 하나로 합치시고, 죄악과 증오를 없애시며, 인류에게 일치와 형제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있는 이 새로운 인간의 기원이시고 그 전형이시며, 또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인간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20. 교회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하나인 양떼로서 만민 가운데 솟은 깃발처럼 온 인류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며, 천상 고향을 목적지로 삼아 희망을 안고 나그네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평화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투신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21. 수많은 심각한 장애가 있지만 많은 사람의 아낌없는 협력에 힘입어 평화를 위한 노력이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표징입니다. 평화는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같습니다. 평화의 건설에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22.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특별히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교와 대학에서, 일터에서, 레저와 스포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평화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불행히도 전쟁의 비극을 겪고 증오심과 적개심을 안고 사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 화해와 용서의 길을 찾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나라와 온 인류를 위한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대희년의 세계 청년대회를 거행하기 위하여 오는 8월에 우리가 로마에서 만나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서 형제 자매의 얼굴을, 친구의 얼굴을 보기 바라며 또 다른 사람들도 형제 자매와 친구의 얼굴을 보도록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이 희년에 우리는 자녀다운 신심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바라봅니다.